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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전 글에서  신림동 묻지마 살인, 서현역 칼부림,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서 수많은 살인예고가 뜨는 현상은 이것이 개인적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문제임을 드러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병폐를 해결하기위해서는 보여지는 증상을 제거하기보다는 그 근본원인을 찾아서 개선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현역 칼부림, 신림동 묻지마 살인

 

 

사회적 원인

그러면 신림역 살인사건, 서현역 칼부림 같은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 근본 원인이 뭘까요?
신림동 살인사건의 피의자 33살 조선의 이야기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오랫동안 나보다 조건이 나은 또래 남성들에게 열등감을 느껴왔다"
"하...너무 힘들어서 범행을저질렀습니다."

정리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만 불행할 수 없다는 피해의식이 종합적으로 불행의 원인"

이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한 번 이야기하지만, 한 개인만이 일으킨 범죄가 아니라 연쇄 반응이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이 사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만 불행한 이유

이런 사건은 비단 이번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3년 전에도 한 PC방에서 10대 소녀가 칼로 묻지마 폭행을 저질러서 3명이 중경상을 입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녀에게도 이런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물어봤더니 "남들은 다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것 같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JqvhOh2laU

 

그러면 이 사회 속에서 할머니 손에 자란 조선 이라는 33살 청년, 그리고 이제 겨우 19살에 불과한 소녀는 왜 모든 사람이 행복한 데 나만이 불행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불행해하고 있는걸까요?

 

우리 사회는 승자와 패자를 구분합니다. 승자는 승자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엄청난 주목과 찬사 속에서 행복하고 멋진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패자는 패자로서의 멸시와 수치를 당하며 루저로서의 비참함을 맛보아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에게 관심과 칭찬과 상장을 주고, 공부를 못 하는 아이에게는 무시와 책망과 훈계를 받게 되죠.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학생들끼리도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자들에게는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시선과 멋진 사람, 잘난 사람이라는 평가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못나고, 한심하고, 무능력하다는 평가와 함께 멸시의 시선이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매일 몇 시간씩 접하는 대부분의 미디어에서는 잘난 사람의 성공스토리가 계속해서 노출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찬양합니다. 반대로 못난 사람의 비참하고 구질구질한 이야기 또한 씹다 버린 껌이 여기 저기 붙어 있는 것처럼 비난의 대상으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인스타에는 어떻게 하든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 좋은 차로 도배를 해서 나 이렇게 멋지게 살고 있다고 홍보를 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 연약한 점, 실패한 것은 어떻게든 감추려 하고 절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유튜브에는 SKY대학에 간 사람의 이야기는 너무 많지만 나머지 대학에 간 사람의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 학생 중 SKY대학에 가는 학생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사회는 그러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의 학생들을 루저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는 서울이 아닌 지방대 학생들을 루저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걸까요?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지방에 있는 대학조차 나오지 못한 아이들은 정말 한심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이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승자가 많을까요? 패자가 많을까요?

우리 사회는 이런 미디어와 경쟁 시스템 속에서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 가치관으로 많은 루저를 생산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영재에서 루저로

서현역 칼부림 사건의 피의자인 최원종은 중학교 3학년인 2015년에 한국수학올림피아드에서 동상을 받기도 하며, 영재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그가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그가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은 특목고에 떨어진 시점부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고에 진학해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며 1년도 다니지 못하고 자퇴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의학과에서 조현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경찰결과 그는 중학교 3학년인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영재소리를 들으며 승자로서 사랑과 인정을 받았던 그가 특목고에 떨어지면서 주변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요? 이제부터 그는 가는 곳마다 루저로서 평가받았을 겁니다. 아마도 그것이 그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을까요?

 


서현역 사건의 최원종은 배달일을 하고 이었고, 조 선도 막노동과 배달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배달일, 막노동 이런 일들에 대한 우리 사회적 시선이 어떤가요?


"본인들이 공부 잘하고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고 했으면, 배달일 하겠어요? 기사들이 뭘 고생해요. 그냥 오토바이 타고 부릉부릉 하면서, 놀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유명한 어느 대형 학원 직원이 배달기사에게 했던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wzjJYArJl64

 

조선의 어린시절?

부모없이(부모가 살아있지만 부모가 양육하지 않음) 할머니 손에서 자란 조선은 주변에서 어떤 시선과 평가를 받으며 자랐을까요?

부모로부터 받아야 공급받아야 할 의식주에 있어서도 빈자로서 평가되었겠죠.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받아야 할 예절, 좋은 삶의 태도, 좋은 가치관을 배우지 못했을 테니까 사회적 상호작용방식에서도 부정적으로 평가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고, 성적으로 평가받는 학교에서도 패자로서 살아 왔을 겁니다. 그 속에서 자신도 스스로 나는 루저라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집단무의식

이것은 이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말로 보편적 무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성공한 사람은 잘난 사람, 실패한 사람은 못난 사람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습니다. 또는 부자는 똑똑하거나 성실한 사람,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거나 한심한 사람, 성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 실패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도식을 갖고 있습니다.

 

즉, 우리모두가 대부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사회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집단의식에 의해서 이런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 어디까지 배웠어요 지금?
(내가) 카이스트 경영대학 나와가지고 MBA까지 그렇게 우리가 그렇게 했는데
카이스트 나온 학부모들이 문제아냐고.
계속 이딴 식으로 해도 되는 거예요 정말?

 

최근 불거진 교권침해도 이런 급 나누기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카이스트 경영대학 나온 학부모의 말에서는 그가 급나누기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무기로서 공부했고, 그가 가진 학력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여길 수 있는 근거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 부자와 가난한 자, 능력있는 사람과 능력없는 사람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 승자와 부자와 능력있는 사람만이 가치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 만이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소수의 승자만이 행복하고 다수의 패자는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패자, 그리고 그 패자라고 여겨지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33살 청년 조선과 같이, 또는 한 때는 영재였지만 지금은 배달을 하고 있는 서현역 칼부림의 최원종과 같이, 또는 SNS를 통해 살인을 예고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이 사회를 향해 저항하고, 그 저항의 수단으로서 폭력이나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은 과거 역사를 통해서도 알수 있는 사회적 현상입니다. 공산주의를 주장했던 마르크스가 큰 인기와 지지세력을 얻으며 공산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의 이런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영화가 바로 우리 나라 최초로 오스카 상을 받았던 기생충이라는 영화입니다. 사회학과를 나왔던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통해 계속해서 이런 사회적 현상을 담아내면서 이 사회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작인 설국열차도 이러한 사회계층적 분열과 다툼을 담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사회계층간 갈등에 대해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영화와 페루에 있는 '수치의 벽' 그리고 칼 융의 집단무의식, 회복탄력성의 개념을 통해 이런 사건이 일어난 심리·사회적 이유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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